“수술 후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아요.”
“전신마취를 하고 나니 머리가 멍하고, 깜빡하는 일이 잦아졌어요.”
이런 고민을 하시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주변에서 “전신마취가 치매를 앞당긴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듣고 더욱 걱정이 커지기도 하죠. 과연 전신마취는 정말 우리의 뇌를 이렇게 손상시키는 걸까요? 수술 후 나타나는 기억력 저하와 집중력 문제는 치매의 전조 증상일까요?
오늘은 이 질문에 대한 과학적 답변과 함께, 수술 후 뇌 건강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방법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1. 전신마취, 뇌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 일시적인 ‘멍함’의 실체
전신마취는 고도의 의학 기술을 바탕으로, 의식과 통증을 완전히 차단하는 상태를 인위적으로 만드는 과정입니다. 이때 사용되는 약물은 뇌의 활동을 잠시 ‘쉬게’ 만드는 역할을 하며, 뇌 전체의 전기적 신호와 화학적 전달을 조절합니다.
수술이 끝난 후 뇌는 이 마취 약물의 영향에서 서서히 벗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일부 환자, 특히 고령층에서는 회복 속도가 느리거나 일시적으로 인지 기능이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평소보다 기억력이 떨어지고, 집중이 잘 되지 않으며, 사고가 느려진 듯한 상태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증상을 의학적으로는 POCD(Postoperative Cognitive Dysfunction, 수술 후 인지기능 저하)라고 합니다.
POCD란?
POCD는 수술 직후부터 시작해 며칠에서 수주 동안 지속될 수 있는 인지 기능의 변화입니다. 주로 다음과 같은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 최근 일을 자주 잊는다
- 익숙한 작업을 실수한다
- 평소보다 말수가 줄거나, 대화 중 맥이 끊긴다
- 집중 시간이 줄고 판단력이 흐릿해진다
이런 변화는 대개 일시적이며, 뇌가 마취 약물과 수술 스트레스에서 회복됨에 따라 서서히 원래 상태로 돌아갑니다.
섬망(Delirium)은 더 급성적인 상태
POCD와는 구별되는 또 다른 뇌의 반응이 있습니다. 바로 '섬망(Delirium)'입니다.
섬망은 매우 급성으로 나타나는 정신 착란 상태로, 수술 후 며칠 이내에 갑작스럽게 발생하며 다음과 같은 증상을 동반할 수 있습니다
- 시간과 장소, 사람을 혼동함
-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함
- 과도한 흥분 또는 무기력함
- 밤낮이 바뀌는 수면 주기의 변화
특히 고령 환자나 기저 질환이 있는 환자에게서 흔하게 나타납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POCD나 섬망은 모두 전신마취 그 자체의 독성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척추마취를 받은 사람에서도 발생률의 차이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 편입니다. 현재까지의 의학 연구에 따르면, 인지기능 저하는 다음과 같은 복합 요인의 결과로 해석됩니다:
- 나이(특히 65세 이상)
- 수술 시간의 길이
- 마취 깊이와 회복 속도
- 수술 중의 저산소증, 저혈압
- 약물 대사 능력의 감소
- 기저 뇌질환 또는 혈관질환
즉, 전신마취는 그중 작은 한 가지 요소일 뿐, 뇌기능 저하의 주범은 아니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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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신마취 vs. 치매 – 직접적인 인과관계는 증명되지 않았다
많은 분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부분일 텐데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전신마취가 치매를 유발한다는 과학적 증거는 현재까지 없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대규모 연구들이 전신마취 경험과 치매 발생률의 연관성을 조사했지만, 마취 자체만으로 치매 발생 위험이 유의미하게 높아진다는 증거는 찾기 어려웠습니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요인들이 수술 후 인지 기능에 더 큰 영향을 미칩니다.
- 환자의 기저 질환: 이미 고혈압, 당뇨, 심장 질환, 뇌졸중 병력, 경도 인지 장애(치매 전 단계)가 있는 환자는 수술 스트레스에 더 취약합니다.
- 고령: 나이 자체가 인지 기능 저하의 가장 큰 위험 인자이며, 고령 환자는 젊은 환자보다 POCD나 섬망 발생 위험이 높습니다.
- 수술의 종류와 시간: 심장 수술이나 장시간의 대수술처럼 신체에 큰 부담을 주는 수술일수록 인지 기능에 일시적인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 수술 중 발생할 수 있는 합병증: 저혈압, 저산소증, 출혈, 감염 등은 뇌에 부담을 줄 수 있습니다.
즉, 전신마취는 수술이라는 큰 스트레스 이벤트의 일부일 뿐이며, 마취 자체보다는 환자의 기존 건강 상태와 수술 과정, 그리고 수술 후 회복 관리가 뇌 건강에 훨씬 더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3. “나도 전신마취 후 기억력이 떨어졌는데…” – 왜 그런 느낌이 들까요?
“나는 분명히 마취 후 기억력이 나빠졌는데, 왜 아니라고 할까?”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분들이 이런 경험을 호소합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노세보 효과(Nocebo Effect)와 과도한 자기 관찰: 수술 전 “전신마취하면 기억력이 떨어진다더라”는 소문을 듣고 걱정하던 환자는, 수술 후 자신의 몸을 과도하게 예민하게 관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평소라면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사소한 건망증(예: 열쇠 둔 곳을 잊거나, 어제 먹은 점심 메뉴가 기억나지 않는 것)도 “역시 마취 때문에 뇌가 나빠졌나 봐”라고 확대 해석하게 됩니다. 이는 기대한 부정적 결과가 실제로 증상처럼 체감되는 심리적 현상으로, 일종의 자기암시와 비슷합니다.
- 수술 후 통증, 불안, 수면 부족 등 신체적 스트레스: 수술 후에는 극심한 통증, 새로운 환경(병원), 불안감, 그리고 낯선 병실 환경에서의 수면 부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몸이 회복에 필요한 에너지를 우선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기억력이나 집중력 같은 고차원적인 뇌의 인지 기능에는 일시적으로 소홀해질 수 있습니다. 마치 심한 감기 몸살에 걸렸을 때 머리가 멍하고 집중이 안 되는 것과 유사한 이치입니다. 뇌는 모든 자원을 생존과 회복에 쏟아붓고 있기 때문이죠.
- 거동 감소와 사회적 고립의 영향: 수술 후 회복을 이유로 장기간 집에서만 지내며 활동을 줄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제는 신체 활동 감소와 사회적 고립이 뇌 건강에 매우 해롭다는 점입니다.
- 뇌 자극 부족: 새로운 환경, 사람들과의 대화, 바깥 활동 등은 뇌에 지속적인 자극을 줍니다. 집 안에만 머물고 반복적인 일상에 갇히면 뇌의 판단력, 기억력, 집중력 회로가 덜 사용되어 약해질 수 있습니다.
- 혈류 감소: 신체 활동은 뇌로 가는 혈류를 증가시켜 신경 세포에 산소와 영양을 공급합니다. 활동이 줄면 뇌혈류가 감소하고, 이는 장기적으로 인지 기능 저하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 우울감 증가: 활동이 줄고 외부 접촉이 사라지면 우울감이 깊어지기 쉽습니다. 우울증은 그 자체로도 인지 기능 저하의 강력한 위험 인자이며, 치매 발생 위험을 높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사회적 고립은 치매 위험을 최대 60%까지 높일 수 있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전신마취 후 나타나는 인지 기능 저하는 대부분 ‘뇌의 손상’이라기보다는 ‘수술 스트레스와 회복 과정에서 발생하는 뇌의 일시적 반응’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심리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이 더해져 실제보다 더 크게 체감될 수 있는 것입니다.
4. 마취 대안으로서의 척추마취, 장단점은?
전신마취의 염려 때문에 척추마취를 고려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척추마취는 하반신 수술에 주로 사용되는 마취법으로, 허리 부위에 마취제를 주입하여 하반신 감각과 운동 기능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킵니다. 전신마취와 달리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수술이 진행됩니다.
척추마취의 장점:
- 호흡기계 안정성: 폐나 기도에 영향을 주지 않아 호흡기 질환이 있는 환자에게 유리합니다. 폐렴 등 호흡기 합병증 위험이 낮습니다.
- 회복이 빠름: 마취에서 깨어나는 시간이 짧고, 수술 후 구역질이나 어지럼증이 적어 빠른 활동 복귀가 가능합니다.
- 마취 후 인지 저하 위험 감소: 전신마취에 비해 수술 후 섬망이나 일시적인 인지 기능 저하가 적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 통증 조절 효과 지속: 척추 마취를 한 통로로 지속적으로 약을 투입해 수술 후 며칠 동안 통증이 덜해 회복 초기 불편감을 줄일 수 있습니다.
척추마취의 단점:
- 적용 부위 제한: 주로 고관절 이하의 하체 부위에만 적용할 수 있습니다.
- 시술 중 환자 불안감: 환자가 의식이 있는 상태이므로 수술 중 소리나, 수술하는 느낌에 불안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필요시 가벼운 진정제를 함께 투여하기도 합니다.
- 저혈압: 마취 후 일시적인 혈압 저하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 마취 후 두통: 드물게 척수액 누출로 인한 심한 두통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수술 후 며칠 동안 머리를 들지 못해서 불편합니다.
- 요통, 감각 이상: 주사 부위 통증이나 다리 저림 등이 일시적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전신마취가 치매를 일으킬까 염려하여 척추마취를 무조건 선호할 필요는 없습니다. 척추마취는 분명 좋은 대안이지만, 모든 수술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환자 개개인의 건강 상태, 수술 부위, 기저 질환 등 여러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가장 안전하고 현명한 방법은 마취과 전문의의 판단과 충분한 상담을 통해 마취 방법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마취과 의사는 환자의 모든 조건을 고려하여 최적의 선택을 안내해 줄 것입니다.
5. 수술 후 뇌 건강,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 회복을 돕는 생활 수칙
전신마취나 수술 자체를 두려워하기보다는, 수술 후 뇌 건강을 적극적으로 관리하여 빠르게 회복하고 인지 기능을 유지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수술 후 뇌 건강 회복을 돕는 5가지 핵심 수칙:
- 초기부터의 점진적인 신체 활동: 수술 직후에는 안정이 필요하지만, 의사나 물리치료사의 지시에 따라 가능한 한 빨리 가벼운 움직임을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침상에만 누워있기보다는 앉거나, 침대 주위를 걷거나, 집 안에서라도 규칙적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신체 활동은 뇌 혈류를 개선하고, 근육량 감소를 막으며, 폐 기능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 규칙적인 수면과 낮밤 구분: 수술 후에는 수면의 질이 떨어지기 쉽습니다. 낮잠은 짧게 자고, 밤에는 충분히 잘 수 있도록 노력하며 낮에는 햇볕을 쬐고 밤에는 어둡게 하여 낮밤 구분을 명확히 하는 것이 섬망 예방 및 뇌 기능 회복에 중요합니다.
- 다양한 인지 자극 유지: 집에만 틀어박히기보다는 가족이나 친구들과 대화하고, 가벼운 독서, 퍼즐 맞추기, 그림 그리기, 음악 감상 등 좋아하는 활동을 통해 뇌에 적절한 자극을 줘야 합니다.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경험하는 것도 뇌 활성화에 도움이 됩니다.
- 균형 잡힌 식단과 충분한 수분 섭취: 뇌는 몸 전체 영양 상태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단백질, 비타민, 미네랄이 풍부한 식단과 충분한 수분 섭취는 뇌 기능 유지에 필수적입니다.
- 긍정적인 마음 유지와 사회적 교류: 수술 후 우울감이나 불안감은 인지 기능 저하를 악화시킬 수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과 소통하고, 힘들 때는 의료진이나 가족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며, 취미 활동 등을 통해 긍정적인 마음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회적 교류는 뇌 건강을 지키는 강력한 보호 요인입니다.
결론: 전신마취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안전한 의료 도구’
전신마취는 현대 의학에서 수술을 가능하게 하는 안전하고 필수적인 의료 기술입니다. 전신마취 자체가 치매를 유발한다는 증거는 없으며, 수술 후 여러 이유가 복합되어 발생한 일시적인 인지 기능 저하는 대부분 회복됩니다.
오히려 수술 후 장기간의 비활동, 사회적 고립, 그리고 통증이나 불안 같은 신체적·정신적 스트레스가 뇌 건강에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수술을 앞두고 있다면 마취 자체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갖기보다는, 수술 전날 마취과 전문의를 청하여 질문하고, 수술 후에는 위에서 제시된 회복 수칙들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여 건강한 일상으로 복귀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